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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부처 영봉 스님이 네팔 한인회장 수락한 까닭은? - 미디어붓다 스크렙

에베레스트아리랑 2013. 3. 22. 11:06

 

히말라야의 부처 영봉 스님이 네팔 한인회장 수락한 까닭은?

 

 

“오지 아이들의 신분추락 교육 기회 줘 막아야죠 히말라야 행선 트레킹에 많은 관심과 동참 기대”

 

이학종기자 urubella@naver.com

 

 

승려 도박 파문으로 한국불교의 위상이 곤두박질 치던 지난 해 5월 부처님오신날 무렵, KBS1TV에서 ‘히말라야에서 부처를 만나다’라는 다큐가 방영됐다. 부끄러움에 불자임을 숨겨야 했던 불자들, 그리고 불교계가 저렇게까지 망가졌나 하며 손가락질 하던 시민들은 이 다큐를 보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거나 ‘저런 스님도 계시는구나!’하며 기대의 끈을 아주 놓지는 않을 수 있었다.

 

 

우리 국민들에게 ‘히말라야의 부처’로 등장하며 감동과 위안을 주었던 주인공 영봉 스님이 이번에는 부처님의 고향 네팔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나타났다.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돼 일시 귀국한 영봉 스님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와 근황, 계획을 들었다.

 

 

인터뷰, 즉 스님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가 보고 느끼는 스님의 진면목은 왜 많은 네팔 사람들이 스님을 히말라야의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지를 절절하게 느끼게 했다.

 

“제 원력이요? 교육을 통해 신분차별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영봉 스님은 당신이 네팔에서 하고 있는 일의 궁극적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명료했다. 자기만족이나 부지불식간 생겨나는 공명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외되고 가난해지고, 급기야 신분까지 천해지는 이 잘못된 시스템을 스님은 온몸으로 저 히말라야의 고지 마을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이 출가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한인회장 추대를 수락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2600여 년 전, 무지와 신의 굴레와 계급의 굴레를 깨뜨리고 전 인류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면을 영봉 스님에게서 볼 수 있었다.

 

 

네팔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부처였다. 스님이 세워준 학교에서 공부하며 글을 깨우치는 어린아이들을 보며 주민들은 ‘우리도 희망이 생겼다. 우리는 살았다’라며 즐거워했다.

 

 



히말라야 부처 영봉스님. 스님은 10년 더 덕쌓은 일에 집중하겠다, 그러면 좌복 위가 아닌 현장에서 보살행 실천을 하겠다는 원력을 가진 후배들이 나타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스님이 네팔 피케이(Pikey) 산정에 파쁘레에 초등학교를 설립한 것은 지난 2010년 10월. 수도 카트만두에서 버스로 8~9시간을 달려 ‘지리’라는 마을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다시 도보로 4~5일을 걸어서 가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 ‘오칼둥가 빠뜰레 파쁘레-6’. 영봉 스님은 그동안 이곳 오지학교의 낡은 건물을 부수고 신축학사를 지었다. 약 5천평의 땅을 구입해서 1차로 초등학교 교사 1동(교실 5개, 교무실 1개), 화장실 1동 및 수각시설을 건립한 것이다.

 

 

이번에 귀국한 연유도 기실 대통령 취임식 참석과 함께 이곳에 한국불자들을 초청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스님의 고귀한 뜻을 따르는 한국인 불자들의 정성이 일군 결실을 직접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또 히말라야의 너무나 아름다운 경관을 소개하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스님은 그래서 ‘영봉 스님과 함께 하는 히말라야 행선(行禪) 트레킹’이라는 이름으로 뜻있는 불자들을 초대했다. 스님의 초대에 응한 불자들은 오는 4월 12일 네팔로 향해 아름다운 히말라야의 경관과 감동적인 파쁘레 초등학교 신축학사의 준공식에 동참하는 뜻깊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그곳에 학교를 왜 지었냐구요? 230년 전 생긴 마을에 교육이나 의료 등 최소한의 시설도 없는 상태에서 이 지역 마을 사람들은 살아왔습니다. 오지의 불편함, 문맹으로 인한 외부로부터의 멸시, 가난하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멸시 등…, 이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었죠. 그 모습을 본 이후 전 고민을 했지요. 어떻게 해야 하나? 부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결국 이 비극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교육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죠. 우선 기초교육기관인 초등학교부터 설립하게 된 이유입니다.”

 

 

스님은 학사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에 오면 머무는 강원도의 작은 수행처 인근에 오가피를 심었다. 그리고 생산한 오가피를 정성껏 스님을 돕는 히말라야의 꿈 회원들, 인우회(산악회) 회원들, 부처님오신날 시주를 해주는 불자들, 개인적으로 후원해주는 지인들, 그리고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청하곤 하는 몇몇 도반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보내주었다. 그런데 이런 스님의 정성이 불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가피를 받은 불자들은 스님에게 크고 작은 정성을 보답으로 보내왔다. 그렇게 모인 정성이 이역만리 히말라야 산정의 오지마을에서 연꽃처럼 학교로 만개한 것이다.

 

 



영봉 스님은 히말라야의 오지에 파쁘레초등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해 노예로 전락하는 삶을 살아가야할 운명을 지닌 이곳 아이들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스님이 지난 해 12월 8일, 네팔한인회 회장 자리를 기꺼이 수락한 것은 네팔에 살고 있는 한인들의 화합과 권익을 도모한다는 취지도 있지만 부처님의 고향, 부처님의 나라 네팔에서 스님이 펼치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네팔에 살고 있는 한인의 숫자는 약 700명. 이중에 선교를 목적으로 온 목사·선교사와 그 가족이 500여 명(목사·선교사 190여 명)을 차지한다. 자연스럽게 네팔한인회는 목사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스님이 한인회장을, 그것도 추대형식으로 맡게 된 것이다. 스님이 외국의 한인회 회장을 맡은 것은 아마도 스님이 최초일 듯싶다. 스님은 한인회장 취임 3개월 만에 한인회의 조직과 시스템을 확 바꿨다. 숙원사업인 한국문화원 건립을 위해 힘을 집중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기독교인 중심의 한인사회에서 ‘스님은 뭔가 다르다’는 평가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기도 하다.

 

 

최초의 재외국한인회장 영봉 스님은 그러고 보면 세계 최초의 기록을 많이 가지고 있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를 단독 등정한 것, 히말라야 등정에 성공한 최초의 종교인, ‘영봉루트’라고 불리는 등정로를 개척한 것 등이 그것이다.

 

 

영봉 스님은 파쁘레초등학교와 한인회장 이외에도 많은 일을 해오고 있다. 네팔 카트만두에 지난 2008년 ‘카트만두 세종학당’을 개설해 네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글과 컴퓨터 교육을 시켜주고 있는데, 벌써 1700의 수료생을 배출했고, 현재 진행 중인 여름학기가 끝나면 2000명이 넘어서게 된다. 이밖에도 태국 메솟 새생명학교를 지원하고 있고, 태국 미얀마 난민촌 누포 캠프 불교중학교 지원과 ‘붓다 사사나 무료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1975년 해인사에서 도겸 화상을 계사로 사미계, 84년 해인사에서 자운 화상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이제 법랍 40여년이 된 중진 영봉 스님. 봉암사와 통도사 송광사 망월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행 정진한 스님이 히말라야 만행을 수행방법으로, 어렵게 사는 네팔 및 태국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보살행의 실천으로 정한 것은 아주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25년 전 어느 해, 스님은 어느 큰 절에 들렀다가 “객실이 없습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여러 인연 때문에 힘들던 시기였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스님은 이 때 살아온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무작정 한국을 떠나 히말라야에 와서는 이 산 저 산을 올랐다. 89년 히말라야의 칼라파타르(5643m), 92년 안나푸르나4봉(7523m)에 오르자, 어느새 스님에겐 ‘산을 오르는 스님’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이번에 영봉스님이 마련한 '영봉스님과 함께 하는 히말라야 행선 트레킹'은 히말라야의 아름답고 웅장한 경관과 보살행의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체험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부처님의 고향, 부처님의 나라 네팔에서 수행자의 길을 걷기로 원력을 세웠다. “‘어머니와 조국의 대지는 천국보다도 아름답다’는 국가표어를 지닌 나라! 한없이 순박한 미소와 함께 연중 꽃이 피고 새들이 지저귀는 신들의 나라!” 영봉 스님은 네팔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연은 스쳐지나가기 때문에 마음을 먹었으면 바로 행으로 옮겨야 합니다.” 곧고 급한 성정인터라 인생의 중요한 방향을 정하는 데도 영봉 스님은 거침이 없었다. 중생을 위한 자비행을 망설이거나 ‘좌복병’에 걸려 있는 한국불교 승단의 풍토에 대한 경종을 말이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다.

 

 

“돌아보면 독야청정, 대쪽처럼 살아왔습니다. 이제 어느덧 환갑의 나이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그동안 쌓지 못한 덕을 쌓을 시간이 아주 부족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은 덕을 짓는 일을 해볼랍니다. 죽을 각오로 하다보면 좋은 결실도 맺어질 것이고, 또 내가 보여준 행적이 후배들에게 길잡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인연이 다해 죽으면 그뿐이고. 허허.”

 

 

부처님이 탄생한 나라인데도 네팔어 불교경전이 없는 나라. 불교국가가 아닌 힌두교의 나라. 그래서 불자들이 더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하는 나라. 그러나 불교 포교보다는 기독교 선교가 더 극성을 부리는 나라. 네팔. 이곳에서 영봉 스님이 할 일은 부지기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모를 정도로 사안들이 쌓여 있다.

 

 

“부처님이 탄생한 나라에, 그 나라 언어로 된 불교경전이 없는 것이 말이 됩니까. 네팔 사람들 특히 네왈리의 일상과 사상이 들어간 불교경전이 만들어져야 이곳에서 제대로 된 불교를 복원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네팔에도 이런 뜻을 가진 불교학자들이 있는 만큼 이 일도 앞으로 해야할 일이지요.”

 

 

한국의 더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나라 네팔과 그곳 사람들과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영봉스님은 그 바람을 다음 카페 ‘히말라야의 꿈’을 통해 나눠가고 있다.

“네팔에 오시거든 꼭 한인회를 찾아주시면 더 고맙고요. 특히 고산병으로 매년 5명 이상이 숨지는 만큼 안전한 산행에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영봉스님은 4월 10일 경 네팔로 떠난다. 4월 12일 ‘영봉 스님과 함께 하는 히말라야 행선 트레킹’에 동참하는 한국의 도반들을 맞이하기 위해 미리 떠나는 것이다. 4월 19일 파쁘레초등학교 신축학사 준공식은 단순한 준공식이 아닌 마을축제로 열린다. 이 아름다운 축제에 동참하고, 히말라야의 부처 영봉 스님을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자 하는 불자들은, 지금 바로 서둘러 마음을 낼 일이다. 동참 문의: 010)6242-0620.

이학종기자 urubella@naver.com